[도서 리뷰] 과학의 융합은 인문으로부터,『과학, 인문으로 탐구하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 연구는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연구는 좁고 깊게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대중과 과학은 점점 멀어졌고 대중에게 과학이란 뉴스에서 잠시 접하는 동떨어진 학문이 되어갔다. 과학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융합’이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있고, 다른 분야 사이의 협력과 조화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되었다. 문제는 융합이라는 개념이 본래의 의미를 잃은 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법램프인 양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융합연구를 추진하는 많고 많은 제도 역시 허울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융합이란 과연 무엇인가?
‘과학, 인문으로 탐구하다’는 명쾌한 관점에서 필자의 궁금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답은 과학의 본질에 숨어있는 인문학과 관련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과학과 인문의 조화를 찾으며 필자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본래 과학이란 학문은 인문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활동이며, 그 자체가 인문학과의 융합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 과목은 실험과 수식으로 구성된 딱딱한 과목이다. 따라서 필자 역시 그러하였듯 과학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과목으로 느껴지기 쉬울 뿐더러 이론이 설명할 수 없거나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등장하면 혼란스럽고 괴리감이 느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귀납법을 제안한 이후, 실험과 수학은 근대 과학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축이 된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은 절대적인 학문이 단연코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성취를 위해 조용히 연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를 사회에 발표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 역시 과학의 커다란 부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상호작용이 발생하였다. 예컨대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 결과와 종교적 신념을 놓고 갈등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견해와 반박을 무릎 쓰고 과학체계를 뒤엎는 이론을 내놓았다. 토마스 쿤은 많은 과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사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은 ‘과학 혁명의 구조’를 집필한다. 그가 제창한 개념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현상에는 과학이 실험이나 이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심리적 요소와 같은 인문적 요소가 포함된다. 핵심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과학과 인문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태생적으로 과학은 융합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었고, 과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에 능숙했다.
오늘날 과학의 대중화(popularization of science)가 강조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학 연구보다도 대중 강연이 더 우선시되던 때가 있었다. 18~19세기 전자기 분야가 바로 그랬다.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개구리 다리에 전류를 흘러 보내고, 산업 박람회에 전기 도구를 전시하는 등 ‘전기 쇼’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쇼를 보던 대중들은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한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필자에게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과학자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실은 허구이며 실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취를 이룬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장춘은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농학에 눈을 뜬 후 배추의 신품종을 개발하는 방식을 발표하며 명실상부한 농학자로 거듭났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태생이 그의 앞길을 방해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의 가담자로 몰려 살해당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조국이란 커다란 딜레마였다. 1950년, 우장춘은 한국으로 귀환한 뒤 한국에서 가장 필요로 했던 우량 채소 종자를 대량생산하여 보급하였다. 한국 농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영웅, 우장춘의 이야기를 읽으며 필자는 과학자의 사명에 대한 인식을 조금 달리 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연구하거나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융통성 있고 현명한 과학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과학은 그 본질적인 모습으로부터 변모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과 같이 주체할 수 없고 제어하기 힘든 기술들이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어떤 과학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731 부대’의 예를 살펴보자. 이시이 시로는 병리학자이자 군의관이었으며 일찌감치 생물무기의 유용성을 깨닫고 이를 개발하기 위해 731 부대를 설치한다. 그들은 전쟁 포로들을 ‘마루타(통나무)’라 부르며 잔혹한 생체실험을 행한다. 이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은 핵무기, 전차, 화학무기 등 괴물 같은 살상무기를 만들어내며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대중과 과학은 점점 멀어졌고 관계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과학자들이 사회와 대중을 소홀히 하였고 잘못된 제도와 인식은 과학을 진정한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저자는 황우석 사태를 꼬집으며 과학 영역에서 연구비 획득이 주요 활동이 되어가면서 논문조작, 연구비 횡령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언론과 매스미디어 역시 연구 성과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황우석을 ‘국보 과학자’라 칭송하며 과다하게 부풀려 보도하는데 급급했다. 이것은 비단 황우석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과학계의 폐쇄성과 수직적 상하관계, 언론의 과다 보도가 합쳐져 발생한 부끄러운 해프닝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대 이후에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오히려 그 본연의 모습을 잊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과학이 인문적 요소인 예술, 철학, 문화가 결합된 융합 학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문학이란 본래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을 말한다. 즉, 우리가 인류인 이상 모든 활동에는 인문학적 요소가 바탕이 된다. 그 말인즉슨, 인문학은 지구상의 모든 학문을 융합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통해 개인의 미덕을 길러주는 역할도 수행한다. 과학자에게 있어서 미덕이 필수 덕목이라는 사실은 앞서 우장춘 박사와 731 부대,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공감한다면, 과학자와 대중 모두의 입장에서 책 ‘과학, 인문으로 탐구하다’의 저자가 주는 메시지를 실천할 때이다. 이제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있던 고전을 꺼내 들어 볼 때가 되었다.
현재 과학의 트렌드로 융합이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과거 본연의 과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일지 모른다. 선진화된 영국의 대중과학정책은 황우석 사태 이후, 그 계몽적 대상을 대중과 함께 과학자 및 관련 기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 모두의 인식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필자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해답은 과거에 있으나 과거회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학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융합의 개념을 더욱 폭넓게 사용하여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문학’이 있다.
▶참고자료
박민아ㆍ선유정ㆍ정원, 과학, 인문으로 탐구하다, 한국문학사, 2015.09.03
박정렬, 융합, 알맹이가 없다?, The Science Times, 2011.12.12.
홍성욱, 과학과 인문학,간극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사이언스온, 201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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