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 사랑의 연수원 후기

2014. 4. 13. 11:08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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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입학한지 고작 3일 만에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니 당황스러웠고 무엇보다도 내가 꽃동네 가족 분들을 잘 도와드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버스에 올라타고 충북 음성으로 떠나면서 꽃동네가 과연 어떤 곳일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여느 복지시설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꽃동네에 도착해보니 처음 드는 생각은 규모가 무척 크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연수원은 우리와 같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배우고 체험하게 하기 위해 설립된 수련원 같은 곳이었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행복한 삶이란 만족한 삶이다라는 문구를 보았다. 정말 멋있는 말이었지만, 평소에도 많이 듣던 말이어서 별로 가슴에 와 닿지는 낳았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은 봉사를 한 뒤에 바뀌게 되었다.

 

  지도교사 선생님께서 기본적인 규칙과 인사법을 알려주셨다. 꽃동네에서 모든 인사는 바로 사랑합니다였다. 또한 박수를 세 번 치면 사랑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아리라고 외쳐야 했다. 이렇게 특이한 인사법을 배우고 나니 조금 이상했지만,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자 나도 점차 똑같은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인사하게 되었다.

 

  맛있는 꽃동네의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나서는 강의를 들었다. 봉사활동을 하러 왔는데 왜 강의를 듣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녀님께서는 사랑도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특히 진정한 거지는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흔히 집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바로 거지였던 것이다. 자신도 거지였지만 걸인 18명을 보살피셨던 최귀동 할아버지의 생애를 보면서 정말 많은 반성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거지로 살아왔던 것이었다.

 

 꽃동네의 역사는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진 것이 없어도 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보살피는 최귀동 할아버지를 보고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단돈 1300원으로 사랑의 집을 지어 걸인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그 작았던 사랑의 집은 오늘날에 이르러 전 세계로 뻗어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꽃동네가 되었다. 수녀님의 강의를 듣고, 23일 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사랑 체험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의 활동이 무척 기대되었다.

 

 다음 활동은 공동체 활동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 효과는 훨씬 커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함께 협동해야 할 수 있는 놀이를 했다. 여러 개의 줄로 연결된 판 위에서 공을 튀기는 놀이였다. 처음에는 균형이 맞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점점 할수록 공을 잘 튀길 수 있었다. 공동체가 이루어 낸 결과였다. 다음은 장애 체험이었다. 여러 가지 놀이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에게 시각장애, 청각장애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하고 벽을 따라 이동하는 체험이었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내 앞에 위험한 것이 있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사히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었다. 많은 뜻이 담겨있던 좋은 체험이었다.

 

  다음날, 드디어 봉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애가 있으신 어르신 분들이 생활하는 희망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내가 가서 봉사를 한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제 강의를 듣고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희망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불쾌한 냄새가 바로 코를 찔렀다. 어떤 할아버지는 TV를 보고 계셨고 어떤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우리를 째려보고 계셨다. 어떤 할아버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신 반면 어떤 할아버지는 화를 내시고 계셨다. 사람들이 모두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정신없는 전쟁터와 같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내가 맡은 곳은 위층에서 일을 거드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꽃동네 가족 분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마저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머뭇거렸던 순간도 잠시, 곧바로 할아버지들이 씻고 나오시면 닦아드려야 하는 일이 생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열심히 닦아 드렸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닦아드렸다. 분명 나는 잘 보이고 싶거나, 무언가를 원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나를 열심히 하게 만드는, 그런 신비한 감정이 있었다.

 

  재미있었던 일은, 한 가족 분은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방까지 가려면 박수를 쳐서 소리로 가는 곳을 알려주어야 했다. , 어떤 분은 기저귀를 쌓고 계셔서 도와드렸더니 자꾸 불평하셨다. 알고 보니 기저귀 방향을 맞추라고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듣고 방향을 바꾸어 드렸다. 사실 방향을 맞춰야 했던 이유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 뒤부터는 일이 쉬웠다. 일 자체가 쉬웠다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익숙해지고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선뜻 나서서 할 수 있었다. 옷을 입혀드린 뒤 방도 쓸고, 휠체어도 닦아드리고, 물도 떠다 드렸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밥을 먹여드리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자세가 불편해 몸이 저렸고, 약을 먹여 드릴 때도 바닥에 떨어뜨리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어르신의 마음을 읽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말을 안 해도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반 전체, 우리 학교 전체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는 새로운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직접 관에 들어가 죽음을 체험하고 부활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당당하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삶이란 아마도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불러주신 변진섭의 노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도 기억에 남는다.

 

  수녀님께서는 가족에 대하여 강의를 하셨다. 어떤 가족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고민해 본 적은 없었지만, 자녀 중심의 가족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사실, 부부 중심이나 부모 중심의 가족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본다면, 부모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자녀로서 부모님께 가지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 온 가족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려면 자녀 중심의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꽃동네에서 보낸 이틀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비록 3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내가 배운 것은 지금껏 16년 동안 배워온 어떤 것보다도 많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떤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할지 결심하고 다짐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꽃동네에서 배운 소중한 것들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

행복한 삶이란 만족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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